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香氣)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어스시(Earth sea)에서 마법이란, 사물의 진정한 이름을 부르는 것부터 시작됩니다. 사람들도 자신의 진짜 이름을 오직 몇 명(전적으로 신뢰하는) 에게만 가르쳐 주지요.
대현자 게드는 '새매'라고 불립니다. '게드'라는 이름은 전 세계에서 7명 만 알고 있지요. 사람 다섯과 용 둘. 나중에 아렌도 알게 되니 총 8명만이 진짜 이름을 아는 셈입니다.
어스시의 마법사에서 '이름'은 소설 그 자체를 이루는 중심말입니다.
1권에서의 어두운 그림자의 이름 알아내기(결국 게드 자신이었죠), 2권에서의 (테나의) 자기 이름 알아내기, 3권에서의 이름을 없애려는 시도를 막아내기, 4권에서의 이름에 숨겨진 또다른 힘 찾기 등등, 소설은 '이름'을 위해, '이름'에 의하여 쓰여진 게 아닌가 싶을 정도이지요.
이름은 곧 진정한 존재의 의미를 뜻하기도 합니다. 사물의 이름이 제대로 지어지거나 불려졌을 때 비로소, 사물은 그 존재의 본래 모습을 보이니까요. 결국 소설은 '존재론'을 다루고 있는 셈입니다.
영화 '게드전기'도 그런 소설의 의도를 매우 진지하게 반영하려고 노력한 듯 합니다. 하지만, 소설에서 치밀하게 짜여 있던 '이름'을 위한 장치들이, 영화에서는 너무나 허탈할 정도로 성기게 보여집니다.
아렌의 갈등을 예로 들어보지요.
아렌은 (어떤 납득할 만한 이유도 없이)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왕국을 도망쳐 나옵니다. 아렌이 그림자에 의한 공포에 질려 그런 일을 저질렀다고 말을 하고 싶었는지는 모르나, 공포와 친부살인, 그리고 칼의 탈취는 결코 연결되지 못했습니다.(이해하신 분 계시면 손 들어보세요.. -_-;)
그러한 의미없는 공포는 아렌으로 하여금 계속 도망만 치도록 만듭니다. 영화내내 아렌은 그 공포에 맞서 싸우지 못합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요. 공포의 대상이었던 그림자를 '사라지게' 한 것은 아렌이 아니라, 테루입니다. 정말 허탈한, 극적 긴장을 만들지도 못했지만 완전히 날려버린 장면이었죠.
소설과 비교해봅니다.
뛰어난 마법능력을 소유했지만, 만용에 사로잡혀 있던 어린 마법사 지망생 게드는 동료에게 무모한 과시를 하다가 어둠의 틈을 열어(과거의 혼을 데려오다가) '그림자'를 불러들이고 맙니다.
그 그림자는 '이름'이 없는 존재이며, (이름이 없기에) 어떠한 힘으로도 물리칠 수 없으며, 세상 어디까지나 지치지 않고 쫓아오는 '공포' 그 자체였지요.
(영화의 아렌처럼) 끊임없이 그림자로부터 도망치던 게드는 (말없는 현자인) 스승의 조언을 받고, 공포의 대상에 맞서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그림자를 쫓아 세계(어스시)의 끝까지 가게 되지요. 거기서 아렌은 공포의 대상인 그림자가 결국은 자신의 또다른 모습임을 깨닫고 그에게 '게드'란 이름을 불러, 그를 처치하게 됩니다.(분리되었던 둘이 다시 하나가 된다는게 아마 더 정확할 듯 하네요)
소설에서는 '이름'과 그로 인한 갈등, 극적 긴장이 한 인물을 통해 그대로 구현됩니다. 하지만 영화는?
다시 한번 고로감독의 과욕이 안타까운 부분입니다.
덧. 아마 더 이어지지 않을까 싶어요~ ;)

